미래에 대해 가장 절실한 물음을 품고 있는 대학생들과 박노해 시인의 대화시간
사진전의 작가와의 대화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인생상담^^이 되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뜨거운 열기와 진지한 생의 물음으로 가득했던 시간을 모두와 나누고 싶어
3부분으로 나눠 연재합니다.
첫번째 부분은
답답한 교실에서 벗어나 첫 자유 앞에 '내던져진' 대학생들에게
좀 더 멀리 국경너머로 '진로'를 정한 친구들에게
두번째 부분은
이미 대학생활에서 무기력함을 느낀 친구들에게
내가 변해간다고 느끼는 그대에게
세번째 부분은
그 모든 친구들에게 박노해 시인이 만난 중동의 젊은이들이 전하는 말
그리고 박노해 시인이 던지는 물음이 있습니다.
대학생들과 박노해 시인의 대화, 그 세 번째 여행 시작합니다.

저는 지금 서울역에 계시는 노숙인 선생님들과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대로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가 많아 힘들기도 했지만,
부족했던 제 자신을 발견하곤 늘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시 '사람만이 희망이다'가 제게 큰 힘이 되었는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희망이란 무엇인지요.
참 장한 일이죠. 의미도 있죠.
그런데 이런 얘기하면 충격일지 모르지만,
인문이 원래 뭐죠?
왜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을 학문체계로 만들어 '학'을 붙여야 합니까?
'학'을 붙이는 순간 무조건 대학을 가야 합니다.
결국은 인문학자는 지식으로, 문자로, 학문체계와 인정받는 시스템 내에서
안주합니다. 그럼 학자가 아닌 나머지 인류 60억은 뭐죠?
저는 저기 계시는 알자지라 움미, 농사꾼 무함마드, 기도하는 민초,
저런 분들을 진성한 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지성, 현장 지성입니다.
저는 인문학자나 지식인의 글이나 시를 보고 감동받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
거기에는 시와 상상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오래된 만년필과 낡은 카메라 하나 뿐
나의 시는 작고 힘없는 사람들, 그 이야기의 받아쓰기이고
나의 사진은 강인한 삶의 기도, 그 영혼을 그려낸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 새겨놓은 이것이 제 삶의 이야기입니다.
삶을 바꾸는 것이 대단한 학문의 진리라고 여러분들에게
비싼 수업료 받고 자격증 쥐어주면서 거대한 논술시장을 만들었습니다.
고전 읽는 것도 언제부턴가 경쟁력이 되었죠.
진정한 독서체험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잘 배운 아이들은 똑똑한 이빨과 경쟁력으로 뭔가 해내겠죠.
그리고 자선을 하며 불쌍한 사람들 도와줍니다.
거기에 '희망'이 붙습니다. 미국이나 서구 유럽 사람들이 했던 것 처럼요..
저는 인문학에 대해서 환상을 갖거나, 인문학 책을 읽으면 대단히 똑똑해지고
자신이 높아진다는 환상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독서를 하되, 삶을 내던지면서 해야 합니다.
인문학과 관련해서 딱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너는 진리를 알려고 하는가, 진리를 살려고 하는가
너는 길을 찾으려고 하는가, 길을 걸으려고 하는가
너는 사랑을 배우려고 하는가, 사랑을 하려고 하는가
삶의 신비를 믿고 첫 마음 대로, 내가 진정으로 행복한,
고유의 길을 과감하게 걸으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대학 그만두고 나오라고 하고 싶지만
난데 없이 야생초원에 나가서 말굽 빠지고
리콜요청 들어올까봐 이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진실로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겁니다.
그런데 원래 나 자신이 작은 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 겸손 아닐까요?
히말라야 봉이 지상에서 가장 높다고 자랑하지만,
수많은 산맥들이 등줄기로 받쳐주지 않으면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높은 것이 좋은 것인가요?
제게는 이 지상에서 결코 없어지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산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제가 사는 시골의 작은 야산입니다.
잡목 숲과 하찮은 잡초들만 가득하고, 누구도 걸어가지 않는 산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가장 소중합니다.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그 야산을 걸으며 눈물을 닦고 시를 쓰고
쌓인 분노를 풀고 걷는 독서를 하고 길을 걸으며 기도드리는 소중한 산입니다.
못나도 울엄마입니다. 세상에 멋있는 남자, 여자들이 정말 많지만
잘생기지도 못한 우리 어머니 아버지하고는 절대 바꾸지 않을 겁니다.
결국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이 유명하다는 것은 무명의 수많은
이름을 가져다 쓰고 있는 것 아닙니까?
권력자라는 것은 누가 정해준 것입니까?
풀뿌리 서민대중이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권력을
위임의 형태로 가져온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지구 자원과 노동하는 사람들의 땀으로 이루어진거죠.
공유재산이고 사회적인 거죠.
그러나 저는 모두가 똑같아져야 한다는 평등주의자는 아닙니다.
손가락이 모두 한가지 모양으로 똑같아지면 어떻게 될까요?
엄지는 작아도 두툼하죠. 새끼손가락은 가늘지만 약속할 땐 새끼로 하죠.
저마다 크기에 따른 고유한 개성과 역할이 있습니다.
이 사회가 물질적으로 완벽하게 평등해야 한다?
한때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며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지만
저는 어떤 '주의자'가 아닙니다.
타고난 대로의 고유한 개성을, 내가 생각하는 행복을,
나의 개성으로 빛나는 삶을 살고 그것이 방해받지 않는 사회.
우리는 너무 사회와 국가에 의존합니다.
국가복지를 잘해야 한다고 얘기들 합니다.
우리나라는 그게 너무 부족하니까 필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국가복지 시스템이 완벽해진다는 건
우리 모두를 국가거지로 의존하게 만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걸 뛰어넘으려면 자급자족하는 다양한 단위의 경제형태가 필요합니다.
모두가 화폐경제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요.
겸손하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죠.
한걸음 더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계 각지에서 만나셨던 젊은이들 중에 인상 깊었던 대학생이 있으셨는지요.
국경너머 젊은이들도 여러분처럼 똑같이 밥먹고 차마시고 연애도 하고 삽니다.^^
그런데 제가 인상깊었던 친구의 말을 꼭 전해야겠습니다.
이 팔찌는 쿠르드 국기 색깔인데요.
소녀 게릴라 니나가 준 것입니다.
니나는 15살 때 자기나라 말도 글도 쓰지 못하고,
전통 옷도 입지 못하는 쿠르디스탄에서 태어났습니다.
학교도 다니지 못합니다. 공식적인 학력도 없습니다.
자기 집이 불태워지고 고향에서 내쫓긴 사람들이죠.
이 팔찌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팔찌의 주인공들은 낡은 총을 들고 터키군의 첨단 무기에 저항하다 죽어갔습니다.
전하고 전해져서 감옥에 있던 니나에게 전해졌고,
감옥을 나온 니나가 저에게 준 것이죠.
쿠르드 여자 게릴라들에게 한국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이 말을 꼭 좀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삶은 소중한 것입니다.
소중하게 한번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저희들 대부분은 손가락이 없습니다.
터키군의 무기를 피해 해발 5천미터의 자그로스산 암벽을 짚으면,
동상에 걸려 하나 자르고, 하나 자르고 하다보니 손가락이 없습니다.
저는 늘 죽음을 머리에 이고 살다보니 삶에 대해 더 절실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선물인지,
아름다운 삶을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고 꼭 좀 전해주세요.
저에게 아름다운 삶은 총이나 폭력 앞에 무릎꿇지 않는 것입니다.
물질적 탐욕으로 다른 나라를 짓밟고,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는 것에
무릎꿇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노래를 부르고
자기답게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친구들이 한국 젊은이들이 제일 부러운 것이 있대요.
눈 덮인 산맥에 있어도 세계 돌아가는 걸 봐야하니까
위성티비를 통해서 다 보는데, 한번은 우리나라
민주화 시위 장면이 나오는 다큐를 본 모양이더군요.
'저희의 꿈은요. 한국 젊은이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최루탄을 맞고 죽었는데 사람들이 거리에 쏟아져나와 장례식을 치러주더라고요.
저희들은 독립운동하다가 그렇게 한번 죽는 것이 꿈입니다.
저희는 만년설이 쌓인 자그로스 산맥에서 첨단무기, 무인비행기의 타겟이 되어
이름없이 죽어갑니다. 제가 죽어가는 장면을 어떤 카메라도 티비도
지켜보지 못하고 친구들이 장례도 못 치뤄줍니다. 시체를 그냥 버리고 가야죠.
그 다음에 여유가 닿을 때 누군가 와서 텔스랄레, '고개숙인 붉은 백합'이라는
비석을 하나 세워줄 뿐입니다.'
자그로스 산맥에서 눈이 녹으면 제일 먼저 피는 것이 붉은 백합입니다.
산맥에서 고개를 숙이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고개숙인 붉은 백합', 피를 바치고 자기를 희생해서
고향에 평화의 봄이 오는 것을 지켜보는 꽃이죠.
이 팔찌는 한국 친구들에게 그 사연을 알려달라고,
니나의 십수명 선배의 선배 손을 넘어 저에게 온 팔찌입니다.
정말 그 동안 이 사연을 전해줄 데가 없었는데
오늘 우리나라 눈맑고 영혼이 맑은 젊은이들을 만나
이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되었네요.
아마 여기 온 분들은 똑같은 현실에 놓이면 게릴라가 될 사람들이 분명하죠?
이 아픈 사연을 꼭 좀 품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사랑은 체험입니다.
저 때는 중고등학교 때만 해도 불꽃같은 키스와 사랑을 했고,
육체관계를 가졌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겁이 나서 사랑도 못합니다.
너무 계산이 많아요.
우리가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하고 사랑의 절정체험에 도달할 때
자신이 의식이 됩니까? 의식하고 있으면 사랑이 아니죠.
절정체험에서 자기 의식이 없어지는 겁니다.
죽어가는 아이를 품에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는데
내가 멋있게 달리고 있는 것 같아, 지금 내 머플러가 휘날리는데
영상으로 찍으면 기가 막히겠다고 한다면 그게 사랑일까요?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자기 중심주의의 벽을 무너뜨려 버리는 것,
내가 없는 것, 그것이 사랑 아닐까요?
리더십의 핵심이 뭡니까? 어떤 지도자를 믿고 따르고 진심으로 존경합니까?
자기희생하는 사람이죠.
당장 생각이 다르더라도 너무나 순수하게 사랑을 밀고 나가는 사람에게
우리는 감동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랑으로 탄생한 위대한 생명입니다.
상처받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처입니다.
사랑하니까 상처받는 것입니다. 상처가 희망입니다.
여러분 안에 상처를 가득 받으십시오.
그리고 상처를 감추지 마십시오. 상처를 내놓으면 그 순간 치유입니다.
상처를 감추면 자폐증이나 정신병, 우울증이 됩니다.
남에게 강한 척 보이지 마십시오. 작고 약하고 무력한 채로 삽시다.
상처는 또다른 상처를 만들고 큰 상처는 아픔을 공유하는 문이 됩니다.
그럼 빛이 쏟아집니다.
발바닥으로 사랑을 찾아가십시오.
머리는 변덕스럽고 마음은 날씨보다 더 빠르게 변합니다.
그러나 발바닥이 가면 내 눈과 지성과 마음이
함께 따라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사진에 폭격더미에서 살아나온 샤나살흡이 있습니다.
13살의 표정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죠?
인간은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품을 때 성스러움이 나옵니다.
여기 오신 여러분도 처음 올 때보다 고통받는 사람들과
시대의 문제를 가슴에 품고 나니까 신성한 빛이 광야의 꽃들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늘 발바닥으로 사랑을 하시기 바라고, 우리가 함께 사랑의 길을
같이 걸어가는 동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저도 이런 말을 할만큼 삶으로, 이 순간을 배신하지 않고
작지만 옳은 방식으로 무력한 시인의 무력한 사랑으로 살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