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광야] 박노해 사진전 - 빛으로 쓴 시
박노해 사진전 [라 광야]

 
[이 남자의 도전] 중동 사진전 연 시인 박노해
 글쓴이 : 매일경제
작성일 : 10-01-18 17:18 조회 : 4,770  
[이 남자의 도전] 중동 사진전 연 시인 박노해
"진실 알리기 위해 카메라 들었다"

암울했던 80년대에 ‘노동의 새벽’이란 시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던 박노해 시인이 ‘라 광야’란 이름의 사진전을 충무로 갤러리M에서 이달 28일까지 열고 있다.

‘많은 광야를 건너왔고/ 막막한 사막을 건너왔다./ 한 마리 야윈 낙타처럼./

…오래된 만년필을 쥐고 있던 내 손에/ 낡은 흑백필름 카메라가 함께 들려졌다./ 절실한 필요는 창조를 낳는 걸까. 죽어가는 아이를 안고 20리 밤길을 단숨에 달려가는 어머니처럼/나는 현장의 진실을 카메라에 담아가고 있었다./



첫 사진전의 배경은 중동이다.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한 부분을 장식했던 그는 왜 중동으로 갔을까.

“나는 자신의 발바닥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낙타처럼/ 국경 너머 전쟁터와 기아 분쟁현장을 걸어 다녔다”는 그를 만나 삶과 미래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얼굴 없는 시인’으로 활동하던 박노해는 1991년 체포돼 무기징역형 선고를 받고 1998년 특별사면조치로 석방되기까지 수감됐다. 특히 세 발짝만 걸으면 벽에 부딪치는 곳에서 24시간 감시받는 독방생활을 오래했다.

그래서 그는 “나와서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은 목욕탕이고, 불빛 없는 어둠 속에서 자고 싶었으며, 끝없이 걸어보고 싶었다”고 한다.

이번에 낸 작품 중에 ‘걷는 독서’가 있듯이 그는 원한대로 많이 걷고 있다. 동트기 전 걸어가면서 기도도 하고 주변의 꽃을 보면서 대화도 많이 한다.

“일제 때 독립운동 하던 분들은 대개 3~4개국은 걸어서 다녔다. 남녘에 태어나다보니 대륙이 끊겼다. 분단된 섬에서 사는 것이다. 감옥 안에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다시 세상에 나가면 국경 넘어 지구촌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보고 싶었다. 국경 넘어 골목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오래 갇혀 있었기에 나의 이념도 갇혔다”는 그는 “현장을 누비면서 진실을 찾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복권된 이듬해인 1999년 박노해는 처음 외국으로 나갔다. 유럽으로 갔는데 건축가 승효상 씨 등이 안내했다. 마침 그곳에서 쿠르드인들의 대규모 시위와 분신자살을 목격했다.

그때부터 그는 국내 문제에 머물렀던 시각을 돌려 세계 평화운동가로 나섰다. 세계의 빈곤지역과 분쟁의 현장을 뛰며 평화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시인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잡은 게 낡은 흑백카메라였다.

‘절실한 필요는 창조를 낳는 걸까./ 죽어가는 아이를 안고 20리 밤길을 단숨에 달려가는 어머니처럼/ 나는 현장의 진실을 카메라에 담아가고 있었다./

광야의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여인 Jerusalem, Palestine, 2005.
이번 작품들은 중동의 분쟁지역인 쿠르드와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에 초점을 맞췄다.

시인은 유프라테스강가에서 물을 대는 한 농부를 보고 세계에서 관개농법이 처음으로 시작됐던 오천년 전 모습을 떠올렸고 수몰 위기에 처한 하산케이프에선 인류문명의 발상지가 수장되고 있음을 애통해 했다.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금지된 모국어로 노래하며 춤춘 쿠르드족 아이들이 ‘지상에서 가장 슬픈 비밀공연’을 했다는 그는 ‘죽은 아빠의 사진 앞에서’ 말없이 시위하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다.

억압받고, 비통함이 넘치는 현장을 담았기에 슬픔과 분노가 넘칠 것 같지만 그의 사진엔 그런 감정까지도 아우르는 듯 깊으면서도 잔잔한 맛이 난다.

태양의 광야를 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시인의 부드러운 눈으로 보았기 때문일까.

그는 이렇게 답한다.

‘시인은 어둠 속에 모국어로 시를 쓰지만/ 절실하면 국경을 넘어 빛으로 시를 쓴다./ 마음이 사무치면 꽃이 핀다!/ 무릎 꿇은 낙타처럼 홀로 되 뇌이며.’

중동은 우리와 가까운 관계

광야의 아잔 소리 Jerash, Jordan, 2008.
박노해는 텁수룩한 수염을 한 채 관람객을 맞았다. 마치 중동사람 같다.

“중동에선 수염이 없으면 거세된 것처럼 생각한다.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을 안아주며 수염으로 문질러주니 너무 좋아했다. 그런데 수염이 너무 길다는 생각에 면도를 하고 갔더니 아이들조차 싫어하더라. 그래서 다시 기르게 됐다.”

그는 “가장 낯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중동의 순박하고 열심히 사는 민초들의 신뢰를 얻었다”면서 “사막을 다니면서 얻은 축복은 가장 위대한 계획자는 하늘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세계 중에서 중동 사진전을 먼저 연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한국과 중동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통의 동심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곳엔 전 세계의 무장이 집중돼 있다. 그만큼 가장 친할 나라인데 가장 멀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중동과 우리는 오래 전부터 교류해온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한다.

“처용도 중동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신라 고분의 석상들을 보면 페르시아인 모습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이 첫 조회 때 회회송축에 귀 기울였다고 하는 구절도 있다.”

이토록 깊은 관계에 있고 세계 문명의 발상지이지만 우리는 너무 미국이나 서구의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한 그는 “중동의 평화가 있어야 우리에게도 진정한 평화가 있다”고 강조했다.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 그는 많은 사람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스스로를 숨겼다.

“민주화정부 때 찾은 이유는 뻔하다. 정치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하기 싫다. 그 일은 나 아니고도 할 사람이 많다.”

그는 민주화운동은 물론이고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조차 남들이 할 수 없었기에 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할 수 있기에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민주화운동을 하는 동안 개머리판에 맞아 수없이 다쳤고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다. 옛날 노동운동 할 때는 노조도 없었다. 1000만 명이 넘는 경제성장 주역이 모두 잊힌 존재였기에 나섰다. 사회주의운동 역시 이념적 금기가 너무 심해 사회주의란 말조차 못하게 했다. 프랑스에서도 사회당이 집권하고 있을 때였는데도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풀렸다.”

세간에선 그런 그를 변절했느니 무슨 주의자라느니 하는 식으로 불러댔다.

“채식을 즐기니 누군가 채식주의자라고 한다. 그런데 채식 위주지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나는 어떤 주의자도 아니다. 사람들은 생태주의니 여성주의니 하면서 스스로를 닫는데 (우리의) 삶이 그렇게 좁지도 않고, 인간의 영혼이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다.”

“체육관 선거 시절,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한 게 급진이라고 한다면 나는 급진주의자가 맞다. 그런데 봄이 되어 봄이라고 하니 일각에선 또 변절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심정을 겨울에 꽁꽁 얼었다가 봄이 되면 풀리는 땅에 비유했다. “땅은 겨울이면 그 안에 품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꽁꽁 닫고 있다가 봄이 되면 스스로를 연다.”

평생의 화두는 사랑

걷는 독서 Al Jazeera, Syria, 2008.
박노해는 삶이 사라지는 시대를 걱정하고 있다. “지금은 탐욕의 시대다. 모든 사람이 책상에 앉아 주식을 살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정든 자기 집이 헐리는데도 ‘경축 재건축’이라고 플래카드를 내건다. 그러나 세상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우정과 신뢰, 영적인 것, 스스로 농사지어 자기 밥상 챙기는 것 등이다.”

그는 끝없이 성장을 추구하는 기존 경영학은 이제 한계가 보인다고 한다.

“우리는 가난했기에 마음껏 뛰놀 수 있었다. 그게 무한한 상상력을 만들어 줬고 지금의 성장을 이루는 원동력이 됐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물고 있다. 지금 아이들은 자유가 없다. 애들한테 투입한 비용을 뽑을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스피드와 관련해서도 너무 속도만을 추구하다보니 모든 삶을 잠식한다. 인간이 견딜 수 없는 환경이다. 삶의 질은 또 어떤가. 열심히 일하고 많이 배우면 삶의 질이 나아져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우리는 오히려 예술이나 건강이 자연 등과 멀어졌다. 이런 문명이 지속가능하지는 않다.”

이제는 이런 사고를 바꿔야 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개인재산이 전혀 없다고 한다. 책은 절판했고 인세는 모두 기부했다.

그 상태에서 시인정신을 유지하면서 영혼을 지키고 가장 적은 돈으로 기품 있게 사는 법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텃밭 있는 시골 셋방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한 달에 70만원으로 살아가지만 그는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생각한다.

“‘라 광야’의 사람들은 소득으로 말하면 최저인데 아주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곳에서 가 있는 동안 돈 내고 밥 먹은 적이 없다. 모두가 환대하며 밥을 먹고 가라고 했다.”

“우리는 세계 67억 인구 가운데 최상층이다. 그런 만큼 정치인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잘 써야 한다. 서로 사랑하고 편안하게 살아가자고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바꿔줘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할 일이 있고 잘 나가는 분이 할 일이 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를 안다. 그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해 분투한다. 흑백필름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지금 디지털 카메라가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제한된 영역 내에서 하기에 온 몸의 열정이 나온다.”

그는 시를 쓸 때도 꼭 육필로 쓴다.

“한계에 이르게 되면 손끝에서 만년필을 통해 피가 잉크가 되어 나오는 것 같다”는 그는 “시인은 지구상에서 멸종위기 1호 동물”라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시를 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시인이 본 성공은 무엇일까.

“사회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전형적인 실패자다. 그러나 행복한 실패자다. 성공의 잣대는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가이다. 하나 뿐인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성공이 아니다. 성공 자체가 삶의 목적이라면 사막에서 말라버리는 올리브나무를 심은 것과 같다.”

그러면서 성공을 위해 달리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되돌아볼 것을 당부했다.

“우리는 경주마와 같다. 내가 열심히 달리는 게 트랙 안에서 달리고 있다는 것을 빨리 알아야 한다.”

지금 뒤선 자가 나중엔 앞선다는 그는 굶어죽지만 않는다면 자부심을 갖고 트랙에서 벗어나 초원으로 나가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녀에게 ‘네가 좋아한 것을 하라’거나 ‘가슴 뛰는 것을 하라’고 하지도 말라고 한다.

“근사한 것 같지만 사실은 폭력이다. 평생 상황이 달라지는데 당장 보이는 것에서 고르라는 것은 크게 될 재목을 지금 깎아서 싸게 팔아버리라고 주문하는 것이다”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딱 무엇을 하라고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랑을 가지고 하라고 당부한다.

“사업을 해도 좋고 예술가가 되거나 교사가 되거나 사회운동을 해도 좋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은 그가 감옥 이후 얻은 평생의 화두이다.

■ 박노해는…

1957년 전남 함평에서 판소리꾼으로 독립운동과 진보운동에 참여했던 부친과 수녀를 꿈꿨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 한 때 신부나 시인을 꿈꾸기도 했다. 7세 때 부친이 타계하면서 식구가 흩어졌는데 나중에 형은 사제가 돼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의장을 맡았고 동생은 수녀가 됐다.

16세 때 상경한 그는 낮엔 학비를 벌면서 밤에 선린상고를 다녔다. 이후 건설 섬유 화학 금속 운수 노동자로 일하며 노동운동을 했다.

1984년 내놓은 ‘노동의 새벽’은 금서조치에도 불구하고 100만부 가까이 팔렸다. 이때부터 수배대상이 된 그는 ‘얼굴 없는 시인’으로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됐다. 91년 체포된 뒤 감옥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를 맞은 뒤 현실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진보이념을 내놓아 파장을 일으켰다. 98년 사면된 뒤 전쟁과 시장만능주의 등에 맞서는 사회운동단체인 ‘나눔문화’를 설립해 글로벌 평화운동을 벌였고 특히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반전운동도 벌이고 있다.

[정진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