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울고 있었다. 40여 점의 사진 앞에서 사연을 이야기하다 굵은 한 방울을 뚝 떨어뜨린다. 정신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반사한 눈물은 세월의 더께가 그득한 피부에 부끄럽게 스며들었다. 20여 년 전,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박노해가 사진작가로 돌아왔다. 군사독재에 맞서다 반국가단체 수괴로 사형이 구형됐고, 무기징역으로 7년 5개월을 복역하다 1998년에 사면, 복권됐으니 근 10여 년 만의 외출이다. 그 동안 너무도 조용했다. “내가 날 광야로 추방했다”고 표현할 만큼 말문을 닫고 침묵했다. 덕분에 1980년대 군사독재시절을 관통한 시집 <노동의 새벽>은 역사의 작은 귀퉁이로 남았다. 옥중 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가벼운 교양서가 됐다.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이들은 사회 주류가 됐지만, 그는 도시를 떠나 농촌의 작은 셋방에서 책 읽고 텃밭 일구며 연명하고 있다. 도대체 그는 왜 스스로를 유배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출소 후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를 설립하고 1년에 두어 달,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등 중동지역을 떠돈 시인은 분쟁지역의 가난과 억울함을 흑백필름에 담아 최근 사진전을 열었다.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엔 희망의 새벽이 간절했다. 에디터 안재형 포토그래퍼 김범기


과거를 팔아서 오늘을 살고 싶지 않다

스스로 광야에서 살고 있다 했지만 트렌드에도 민감한 것 같다. 결국은 삶이 중요하다. 좋은 삶이 있어야 좋은 사회가 가능한 것 아닌가. 그 삶의 변치 않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선 변화에 주목해야한다. 난 미래는 젊은 세대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중요한 공부지.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는데, 그 때 가장 갈망한 게 젊은 친구들의 감각과 감성이었다. 사실 그들의 트렌드를 배우려고 잡지도 많이 구독했네. 여성지도 보곤 했으니까(웃음).

요즘에는 어떻게 트렌드를 읽고 있나. 각 대륙의 분쟁현장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만나고 기록하면서 지내고 있다. 전 세계를 다니지. 그러다 돌아오면 서울에서 나눔문화 일을 잠깐 보곤 시골에 내려간다. 집에 TV도 없고 인터넷도 없이 농사를 짓고 있지. 작은 셋방에서 하루 15시간씩 독서하고 연구하고 시를 쓴다. 생활이 굉장히 단순하다. 대신 대지에 뿌리를 내린 단순한 삶이 있기 때문에 트렌드를 포착하는 감각이 날카로워지는 것 같네. 또 나눔문화의 학생들, 그 친구들과 함께 하다보면 번뜩번뜩하는 게 있더라고. 몸에 바로 흡수되는 느낌이다.

사실 젊은 세대에게 당신은 더 이상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그만큼 나서지 않았는데,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기엔 앞에 나서는 생활이 우선 아닌가. 10년 동안 그랬지. 민주화 이후에 같이 운동하던 많은 분들이 주류 권력이 됐다. 반대로 많은 분들이 이만큼의 풍요와 민주화를 위해 죽어갔다. 난 살아남았지. 과거를 팔아서 오늘을 산다? 그건 내 영혼이 허락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출소하고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유명인사가 돼 있더라고. 그건 아니지. 난 작고 보잘 것 없는 민초 중에 한 사람인데… 스스로 잊혀지는 게 필요했다. 내게 주어진 건 내 것이 아니고 그 시대에 헌신했던 모든 분들의 것이거든. 그래서 책도 다 절판시켰다. 아마도 언론에 자주 나오는 게 효과적일 순 있겠지. 허나 그것보다 중요한 건 진정성이다. 옳은 일을 작고 꾸준하게 밀고 가는 게 가장 큰 힘이다.

그래서인지 2000년에 설립한 ‘나눔문화’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다. 회원은 얼마나 되나. 석방되고서 설립했는데, 그 때 원칙을 세웠다. 정치하는 분들은 회원으로 받지 않고, 재벌 기부, 정부지원 일체 받지 않고, 언론 홍보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 자기 자리에서 삶의 소중한 원칙을 놓지 않는 분들, 지구시대에 국경 너머의 일에 책임을 느낄 줄 아는 글로벌 시민들, 이런 분들과 함께 했다. 처음에는 회원이 30명도 안됐는데, 10년 동안 1800명이 됐다. 자발적인 회비로 난민촌에 학교도 운영하고 현지인들이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지. 철저한 글로칼(Global+Local) 모델이다. 미국 중심의 세계화가 아니라 지역민들이 중심인, 그렇게 연대하고 나누고 있다. 돕고 동정한다가 아니라 나누고 존중할 줄 아는 문화다. 회원들이 좀 더 늘어났으면 좋겠는데, 이것 역시 나무를 심듯이 차근차근 숲을 키워간다면 흔들리지 않는 문화유산이 되지 않을까. 천년의 긴 호흡으로 간다.

오랜 감옥생활 끝에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독방생활을 오래했는데, 24시간 감시하는 담당이 늘 붙어있었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목욕탕 가는 거(웃음). 전깃불 없는 어둠, 고슬고슬한 잠자리도 그리웠고, 발목이 시리도록 걷고 싶었다. 관짝 만한 감옥에선 두 걸음 반이면 쇠창살이고 돌아서면
‘뺑끼통’이었거든. 빚을 내서라도 국경너머 인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구의 골목길에서 진실을 보고 싶었다. 언제나 진실은 현장에 있고, 희망은 작은 자들 속에 있다는 게 내 신념이다. 그래서 더 나가고 싶었다.

출소 이듬해에 그 꿈도 이뤘다. 정말 빚내서 나간 건가. 그랬지. 난 지금도 개인재산이나 벌이가 없거든. 책을 내더라도 인세는 모두 기부했다. 시인 정신을 유지하고 영혼이 부르는 길을 걸어가려면 돈에 노예가 되선 안될 것 같았고. 가장 작은 소유로 기품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생각했지. 그래서 시골로 내려갔다. 어쩌면 서울의 집값이 비싸서 밀려난 걸 수도 있고(웃음).


문제는 탐욕의 포퓰리즘이다

처음 도착한 국경 너머는 어디였나. 친구들이 안내하겠다고, 꼭 같이 가자고 해서 도착한 곳이 유럽이었다. 운명인지, 그곳에서 쿠르드인들의 항위 시위를 목격하곤 중동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됐다. 중동이슬람 인구가 13억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겐 가장 낯설고 알지 못하는 지역이다. 우린 서구의 시각으로만 다가서고 있지. 세계에서 가장 큰 고통의 중심지가 중동이슬람, 그리고 한반도 아닌가. 가장 친밀할 수 있음에도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첫 사진전으로 중동이슬람지역을 선택했다.

10년 간의 발자취를 담았다.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을 텐데. 말이 통하지 않고 종교나 문화가 다름에도 마을마다 내가 들어서면 ‘샤이르(시인) 박’이라 외치면서 반겨준다. 중동의 순박하고 고통받는 민초들에게 사랑과 신뢰를 얻은 게 가장 큰 선물이지. 잃은 것은 딱 하나. 검은 머리카락이다. 하도 불볕이 내리쬐고 며칠씩 머리를 못 감다보니 한번 다녀오면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지더라고(웃음).

그래서 수염을 기른 건가. 우리가 수염을 깎은 건 아마 100년도 되지 않았지. 중동 남자들은 서구화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수염으로 판단한다. 수염이 없는 사람은 거세된 남자로 취급하지. 그것도 그렇지만 그곳에서 아이들을 달랠 때 가장 좋은 게 수염이다. 안고서 볼에 수염을 비벼대면 금세 친해지거든. 한번은 면도를 했더니 너무 싫어하더라고(웃음).

사실 그동안 국내에도 찾는 이가 많았다. 여러 매체가 기사를 통해 글을 청탁하기도 했는데. 과거 민주화 정부 때는 찾는 이유가 뻔했지. 정치하라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그건 하려는 분들이 굉장히 많고 이런 일은 아무도 하려는 이가 없거든. 분쟁지역에서 군인들의 개머리판에 맞아가며 걷다보면온몸에 멍이 들고 성할 날이 없다. 아무도 안하려 하지. 그래도 해야 하는 일 아닌가. 정권이 바뀌면서 내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이젠 국민들 모두 똑똑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탐욕의 포퓰리즘이다. 세상에 정든 골목길, 추억이 묻어있는 집이 헐리는데 ‘경축 재개발’이란 플래카드가 붙는다. 오죽하면 새해 인사마저 “부자되세요” 아닌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인데,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는 사회가 됐다. 많이 배울수록 지혜로워지고, 소득이 늘수록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정반대로 가고 있다.

하지만 부자, 여유로운 생활은 누구나 되고 싶고, 갖고 싶은 것 아닌가.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지. 난 내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한다. 디지털 카메라를 쓰지 않고, 흑백필름 카메라를 쓰는 것도 그 제한된 조건에서 작업할 때 잠재된 창조력과 생명력이 용솟음치는 걸 느끼거든. 컴퓨터를 쓰지 않고 만년필이나 연필로 시를 쓰는 것도 그런 이유다. 정말 힘이 들 땐 피가 잉크로 뭉쳐지는 것 같은 처절함…. 삶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가장 적은 돈으로 생활할 때, 가장 알뜰하게 살며 최대한 행복감을 높이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군사독재 시절엔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외치더니 이젠 3만 달러를 외치고 있다. 점점 풍요로워지고 있지만 과연 행복감도 그러할까. 중동이슬람 지역의 사람들은 최저 수준의 소득이지만 누구 하나 불행해 하지 않는다. 다만 폭격만 없었으면 하지. 없이 살지만 나누려는 정이 살아있다. 그럼 과연 누가 잘 살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어려운 시절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고, 우리에게 주어진 걸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이젠 사랑하면서 살자고 국정지표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탐욕의 포퓰리즘을 벗어난 가치관의 변화, 세계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 작업은 어쩌면 시인이 해야 할 역할이겠지.


우승한 경주마도 트랙을 도는 게 전부다

과거 당신은 폭력투쟁도 불사한 급진 노선이었다. 현재 당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때 채식을 했더니 사람들이 채식주의자냐 묻더라고. 난 채식위주자지 주의자가 아니다. 난 어떤 주의자도 아니고 위주자다. 사회주의건 생태주의건 여성주의건 자본주의건 어떤 주의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건 글쎄, 삶이 그렇게 짧은가. 현실이 그렇게 한 손에 잡히는 걸까. 어떤 면에서 난 모던주의자이기도 하고 아무 주의자도 아니다. 한 겨울의 땅은 자기 몸을 딱딱하게 만든다. 하지만 봄엔 싹을 틔우기 위해 한없이 부드러워지지. 난 우리나라에서 농사짓는 분들이 가장 급진적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도시로 가려하고 아파트가 꿈이고, 어려서부터 동료들을 밟고 이기고, 그래야만 잘 살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풍토 속에서 묵묵히 농사짓고, 바다에서 고기 잡고 소농하는 분들. 이분들이 급진주의자고 성자이고 마지막 씨알이지 않을까.

20여 년 전의 노동운동과 지금은 달라진 게 많을 텐데. 오늘날 노동운동이 힘을 잃은 이유도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난 이농 1세대인데 돌아갈 곳이 있었지.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돌아갈 곳이 없다. 아스팔트에선 뿌리를 내릴 수 없거든. 도시에선 희망이 자리하기 쉽지 않다. 삶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작지 않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그 삶이 달라졌을까. 어린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나. 우리 세대의 꿈은 최하가 대통령 아니면 장군이었지(웃음). 왜 그거냐고 물으면 모두가 애국, 남을 위해서란 말을 했다. 내가 아니라 남을 생각했지. 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사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또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게 좋았고.

그 삶이 끊임없이 변신했다. 사실 계획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세상을 알게 된 후론 단 한 번도 무언가 되고 싶다거나, 하고 싶어서 선택한 게 없었네. 젊은 시절부터 인생의 화두는 늘 ‘어떤 게 옳은 삶이냐’란 물음인데, 그걸 추구하다보니 나머진 저절로 따라왔다. 지금 이렇게 전시회를 열고 있는 사진도 그렇고. 내일은 또 뭘 하게 될지…. 뭘 해도 좋다. 그런데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지. 한번 뿐인 인생, 단 하나뿐인 자신을 왜 남과 비교하고, 남보다 잘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는 건가. 그건 살아남기 위한 것일 텐데, 도대체 그렇게 살아남아서 뭘 어쩌려구. 사랑이 없다면 개인의 탐욕이 무기가 될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어떤가. 성공한 삶이었다고 생각하나. 사회의 잣대로 보면 전형적인 실패자겠지. 요즘 말로 루저 중에 루저다.(웃음). 그런데 행복한 걸 어쩌겠나. 의미와 가치를 가진 실패자라고 보는데, 아주 행복한 실패자다. 성공의 잣대는 단 하나 아닐까. 진정한 네 자신을 살았느냐. 네 자신은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인데, 자신을 살지 못하고 사회의 성공에 맞추려고만 하거든. 강제 이식이지. 성공 자체가 목적인 삶은 사막일 수밖에 없다. 삶의 목적은 삶 그 자체다. 성공하려고 열심히 달리는 건 경주마의 논리인데, 아무리 앞서봤자 트랙을 뛰고 있을 뿐이지. 열심히 달려서 우승하지만 그건 트랙 안이다. 빨리 초원으로 나가야지.

시인 박노해 1957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상경해 선린상고(야간부)를 졸업했다. 이후 섬유, 화학, 금속, 운수 노동자로 일했다. 현장 노동자로 일하던 중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펴내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1991년 3월에 체포돼 ‘반국가단체 수괴’ 죄목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형에 처해졌다. 1993년 시집 <참된 시작>, 1997년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펴냈다. 1998년 8월 15일, 8년 여 감옥 생활 끝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다. 2000년부터 사회적 발언을 금한 채, 홀로 세계의 빈곤 지역과 분쟁 지역을 돌며 평화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중동지역을 돌며 삶을 직시한 10년 간의 기록을 모아 사진전 <라 광야>(서울 저동 갤러리 M, ~1월 28일)를 열었다. 올해 말, 각 대륙의 사진을 선보일 예정이다.